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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최강 대한민국,,, 꿈의 정부





대통령 - 세종대왕

조선의 제4대 왕(1418~50 재위).
재위기간 동안 유교정치의 기틀을 확립하고,
공법(貢法)을 시행하는 등 각종 제도를 정비해 조선왕조의 기반을 굳건히 했다.
또한 한글의 창제를 비롯하여 조선시대 문화의 융성에 이바지하고
과학기술을 크게 발전시키는 한편, 축적된 국력을 바탕으로 국토를 넓혔다.
이름은 도(). 자는 원정(元正). 태종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이다.
비(妃)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이다.







국무총리 or 통일부 장관 - 김구

본관은 안동. 아명(兒名)은 창암(昌巖), 본명은 창수(昌洙), 구(龜)·구(九)로 개명했다.
자는 연상(蓮上), 호는 연하(蓮下)·백범(白凡). 아버지는 순영(淳永)이며,
어머니는 곽낙원(郭樂園)이다.
1887년 11세 때 아버지가 집안에 세운 서당에서 한문과 한글을 익혔다.
15세에는 정문재(鄭文哉)의 서당에서 당시(唐詩)와 〈대학〉을 공부하고 과문(科文) 등을 익혔다.
17세때 우리나라 마지막 과거인 경시(慶試)에 응시하기 위해 해주에 갔으나,
매관매직을 보고 과거를 포기하고 돌아와 풍수지리서·관상학·병서 등을 읽으며 훈장을 지냈다.






국방부 - 광개토대왕

고구려 제19대 왕(391~412 재위)

대외적인 정복사업을 정력적으로 수행하여
재위기간 동안 고구려의 영토와 세력권을 크게 확장시켰다.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써서 중국과 대등한 입장을 보였다.
본명은 담덕(談德). 중국측 기록에는 안(安)으로 전한다.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고도 한다.
제18대 고국양왕(故國壤王)의 아들이다.
386년(고국양왕 3)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391년 즉위했다






과학기술부  - 장영실

비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재능과 기술로 조선 전기 과학기술 수준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본관은 아산(牙山). 아버지는 귀화한 중국인이며, 어머니는 기녀였다고 한다.
동래현(東萊縣)의 관노(官奴)로 있다가 뛰어난 기술재능으로 발탁되어,
1423년(세종 5) 노비 신분을 벗고 상의원별좌(尙衣院別座)로 임명되었다.
1424년 중국의 체재를 참고하여 물시계를 만들어 그 공으로 행사직(行司直)이 되었다.
1432년 김돈(金墩)·이천(李) 등을 도와 간의대(簡儀臺)의 제작에 착수하고,
각종 천문기기의 제작을 감독했다. 1433년 호군(護軍)에 올랐으며,
같은 해 6월 혼천의(渾天儀)를 완성했다.
이듬해 김빈(金)과 함께 자동시보(自動時報)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를 만들었다.
11세기 송(宋)의 소송(蘇頌)이 제작한 천문시계장치와
아라비아 시계의 자동시보장치에 영향을 받은 이 시계는
시(時)·경(更)·점(點)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종·북·징을 쳐서 시보를 알리도록 되어 있었다.
1434년 7월 1일부터 사용된 표준시간은 자격루에 맞추어 운용되었다.
또한 같은 해 금속활자인 경자자(庚子字)의 결함을 보완한 갑인자(甲寅字) 제작을 감독했다.
1437년 천체관측용 기구인 대·소간의(大小簡儀), 공중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懸珠日晷), 태양시(太陽時)와 항성시(恒星時)를 측정하여
주야 겸용 시계로 쓴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태양의 고도와 출몰을 측정하는 규표(圭表) 등을 완성했다.
다음해 자격루의 일종인 옥루(玉漏)를 제작, 완료하고 경상도 채방별감(埰訪別監)이 되어
동(銅)·철(鐵)의 채광·제련을 지휘, 감독했다.
1441년 강우량 측정기인 측우기(測雨器)와 하천 수위 측정기인 수표(水標) 제작을 감독, 완성했다. 상호군(上護軍)으로까지 특진했으나
1442년 그의 감독으로 제작된 왕의 가마가 부서지는 바람에 투옥, 파면당했다.





외교통상부 - 서희


942(태조 25)~998(목종 1).
고려 초기의 정치가.
본관은 이천. 자는 염윤(廉允). 아버지는 내의령(內議令)을 지낸 필(弼)이다.
할아버지 신일(神逸) 때까지는 이천 지방의 토착 호족이었다가
아버지에 이어 자신도 재상에 오르면서 중앙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했고,
뒤이어 그의 아들 눌(訥)과 유걸(惟傑)이 각각 문하시중(門下侍中)과
좌복야(左僕射)를 지냈을 뿐 아니라 눌의 딸이 현종의 비가 됨으로써
고려 사회의 주요 문벌귀족세력이 되었다.






보건복지부 - 허준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청원(淸源), 호는 귀암(龜巖).
허준은 1546년(명종 1) 지금의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에서
아버지 허론(許碖)과 어머니 김(金)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양천허씨의 시조인 허선문(許宣文)의 20세손이다.
할아버지 곤(琨)은 무관으로 경상우수사를 지냈고 아버지 론 역시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지냈다.
허준은 어릴 때 경상도 산청으로 이사하여 이곳에서 성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허준은 이곳에서 어려서부터 의사수업을 시작했다.
그는 서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신분제 사회에서 벼슬길로 나가지 못하고 당시 중인이나
서얼들의 업으로 되어 있던 의학의 길을 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허준의 총명과 열성은 이미 20대에 그를 전국적으로 유명한 의사가 되게 했다.
1569년 6월 그의 나이 24세 되던 해 부제학 유희춘(柳希春)의 부인을 치료하기 위해
서울로 초치되었고 이듬해에는 유희춘의 병까지 치료하게 되어 서울 장안에서 명성이 높았다.





해군참모총장 - 이순신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서울 건천동(乾川洞)에서 태어났다.
1572년(선조 5) 무인 선발시험인 훈련원 별과에 응시하였으나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으로 실격되었다.
32세가 되어서 식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첫 관직에 올랐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과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1583년(선조 16)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을 지냈다.





육군참모총장 - 을지문덕

고구려의 장군.〈자치통감 資治通鑑〉에는 위지문덕(尉支文德)으로도 되어 있다.
살수대첩(薩水大捷)을 승리로 이끈 고구려의 장군으로만 알려질 뿐,
개인과 관련된 사실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어떠한 문헌에 근거했는지 알 수 없지만,
〈해동명장전 海東名將傳〉에 그가 평양 석다산(石多山) 사람이라고 전한다.
을지문덕의 성인 '을지'에 대해서는 고구려 관등 우태(于台)와 같이 연장자나
가부장을 뜻하는 것으로 풀이하기도 하고,
'을'만을 성으로 보기도 한다. 또 선비족 계통의 성인 '위지'(尉遲)와 을지를 같은 것으로 보아
고구려로 귀화한 선비족 계통의 사람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1군사령관 - 연개소문

(고구려 재상)  [淵蓋蘇文, 개소문, 천개소문]

?~665(보장왕 24).
고구려 말기에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재상.
〈삼국사기〉 열전에는 그의 성을 천(泉)이라 했으나
이는 당 고조의 이름자인 연(淵)을 피하여 천으로 표기한 중국문헌에 의거했기 때문이다.
그의 시조가 샘[井] 또는 물[水]에서 태어난 연유로 연을 성으로 삼았다 한다.
개소문은 개금(蓋金)이라고도 하는데 금(金)의 음(音)인 '소'·'쇠'를 한자로 옮긴 것으로 생각되며, 〈니혼쇼키 日本書紀〉에는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라고 기록되어 있다.
1923년에 발견된 천남생묘지(泉男生墓誌)에 의하면
할아버지는 자유(子遊), 아버지는 태조(太祚)로 모두 막리지(莫離支)를 역임했다고 한다.
동부(東部 : 또는 西部) 대인(大人)이었던 아버지가 죽자 연개소문이 뒤를 잇게 되어 있었으나
성품이 잔인하고 모질다 하여 지위를 계승하지 못하다가 귀족들에게 간청하여 겨우 승인을 받았다. 642년(영류왕 25) 천리장성 축조를 감독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그가 아버지의 지위를 이은 뒤 흉포하고 잔인하여
귀족들이 영류왕과 비밀리에 의논하여 그를 죽이려 했다.
그러나 이를 먼저 간파한 그는 동부의 군사를 모아
사열하는 체하며 귀족들을 초청한 뒤 급습하여 죽였다.
그리고 궁궐로 쳐들어가서 영류왕을 살해하고
왕의 조카인 장(臧 : 보장왕)을 왕으로 옹립한 뒤 자신은 대막리지가 되었다.
이 정변에서 죽은 자가 100여 명에 달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귀족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단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정치적·군사적 실권을 장악한 그는 5개의 칼을 차고 다니며,
외출할 때는 의장대를 앞세우고 대단한 위엄을 부렸다.
그러나 안시성(安市城) 성주는 그에게 굴복하지 않아
연개소문이 군사를 내어 성을 쳤으나 함락되지 않자 성주의 지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정변을 통해 권력을 장악할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는 매우 긴박했다.
즉 수나라를 이어 중국의 통일왕조로 등장한 당나라가 세력을 강화하여
고창국(高昌國)과 돌궐(突厥)을 멸망시키고 서서히 동쪽으로 압력을 가해오고 있었다.
고구려에서 천리장성을 쌓은 것도 이에 대한 대비책이었다.
또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의 충돌이 격화되면서 신라는 당과 적극적인 연결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 정권을 잡은 그는 왕에게 도교를 수용할 것을 건의하여
당나라에서 도사(道士)를 맞이하고 〈도덕경〉을 전해받기도 했으나,
대외적으로는 시종일관 강경한 노선을 견지했다.
백제의 공격으로 대야성(大耶城 : 지금의 합천)이 함락되어
위기를 느낀 신라의 김춘추(金春秋)가 직접 고구려를 방문하여 협상을 시도했으나
이를 거부했고, 당에서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奬)을 사신으로 보내
신라에 대한 공격을 그칠 것을 요구했으나
신라에게 빼앗긴 고구려의 영토 500리를 회복하기 전에는 전쟁을 그만둘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당 태종은 다시 사신 장엄(蔣儼)을 보냈으나,
연개소문은 그를 굴실에 가두었다. 이에 당 태종은 644년(보장왕 3)에
연개소문의 시역(弑逆)을 성토한다는 명분을 걸고 군사를 내어 직접 고구려 침략에 나섰다.
고구려의 장군 고연수(高延壽)와 고혜진(高惠眞)이
고구려군과 말갈군으로 구성된 15만의 구원군을 이끌고 출전했으나
안시성 동남쪽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안시성전투).
당은 요동지방에 있는 고구려의 일부 성을 함락시키고 안시성을 포위했다.
당군은 필사적으로 안시성을 공격했으나
안시성의 완강한 저항으로 함락에 실패하여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당에서는 이후에도 몇 차례 군사를 파견하여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태종이 철수하면서 연개소문에게 활과 의복을 보냈으나
그는 이를 받고도 사례하지 않았으며
이후 비록 당에 사신을 보내 글을 올렸지만 정중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강력한 권력을 배경으로 수년에 걸쳐 계속되는 당과의 투쟁을 주도하면서
신라에 대해서도 공세를 계속했다. 그러던 중 신라와 당이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뒤,
661년 다시 고구려를 침략해 소정방(蘇定方)이 이끄는 군대가 평양성 부근까지 접근하기도 했다
. 이때 그는 아들 남생(男生)을 압록강에 보내 당군이 건너지 못하도록 막았으나
강이 얼자 건너온 당군에게 고구려군이 패하여 남생은 겨우 몸을 피하기도 했다.
이듬해 방효태(龐孝泰)가 이끄는 당군이 다시 침입하자 연개소문은 직접 사수(蛇水) 언덕에서
접전을 벌여 적군을 몰살시켰다. 그러나 그의 대외 강경정책은 고구려의 국력을 소모시키기도 했고, 그의 사후에 내부 결집력이 약화되고 정치적 혼란이 초래될 소지를 안고 있었다.
결국 665년에 그가 죽자 곧 장남 남생과 남건(男建)·남산(男産) 등 아들들 사이에서
불화가 일어났고, 남생은 당에 투항했다.
그의 동생 연정토(淵淨土)도 12성(城)을 이끌고 신라에 투항했고,
이들 성에는 신라군이 배치되었다.





2군사령관 - 강감찬

본관은 금천(衿川). 어릴 때 이름은 은천(殷川).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궁진(弓珍)의 아들이다. 983년(성종 2) 진사시에 합격하고,
임헌복시(任軒覆試)에서 갑과에 장원한 뒤 관직에 올라 승진을 거듭하여 예부시랑이 되었다. 그뒤 국자제주(國子祭酒)·한림학사·승지·중추원사·이부상서를 역임했고,
1018년 서경유수와 내사시랑평장사를 겸했다.
1020년 특진 검교태부 천수현개국자 식읍오백호(特進檢校太傅天水縣開國子食邑五百戶)에
봉해진 뒤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뒤 1030년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고, 이듬해 덕종이 즉위하자
개부의동삼사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 특진검교태사 천수현개국후
식읍일천호(開府儀同三司推忠協謀安國奉上功臣特進檢校太師天水縣開國侯食邑一千戶)에
봉해졌다.
죽은 후 현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현재 그의 묘소는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에 있다.
저서에 〈낙도교거집 樂道郊居集〉과 〈구선집 求善集〉이 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문종(文宗) 때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兼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인헌(仁憲)이다





3군사령관 - 김유신

595(진평왕 17)~673(문무왕 13).
신라의 삼국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한 장군.
본관은 김해. 가야국 김수로왕의 12대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532년(법흥왕 19) 신라에 투항한 금관가야의 구해왕(仇亥王)이며
아버지는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를 지낸 서현(舒玄)이다.
어머니는 지증왕의 증손녀이자 갈문왕 입종(立宗)의 손녀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이다.
김춘추와 결혼한 문명왕후(文明王后)가 그의 누이동생이다.






재정경제부 - 임상옥

1779(정조 3)~1855(철종 6).
조선 후기의 무역상인.
본관은 전주. 자는 경약(景若), 호는 가포(稼圃).
아버지는 중국 연경(燕京)에 내왕하던 상인인 봉핵(鳳翮)이다.
그가 태어난 의주는 조선 후기 대중국 무역의 중심지였다.
그는 1796년(정조 20)부터 상계에 투신했다.
그가 국제무역의 거상(巨商)으로 성공하기까지는 중앙권력의 뒷받침도 크게 작용했다.
1810년(순조 10) 이조판서 박종경(朴宗慶)의 권력을 배경삼아 의주상인 5명과 함께
최초로 국경지방에서 인삼무역 독점권을 획득했다.
1811년 홍경래(洪景來)가 주도한 평안도농민항쟁이 일어났을 때
서북지역의 많은 상인들은 홍경래의 봉기군에 참여했으나,
그는 중앙권력과의 연계를 바탕으로 관군을 지원하는 의병(義兵)에 참여하여
방수장(防守將)이 되었다.
이는 그가 당시 홍경래의 봉기군이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던
권신 박종경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으며,
이미 특권상인으로 성장하여 홍경래군을 지원한 다른 상인들과 이해관계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의 상업적인 수완은 중국 상인들이 따르지 못할 만큼 탁월했다.
1821년 변무사(辨誣使)의 수행원으로 청에 갔을 때,
베이징 상인들이 불매동맹을 펼쳐 인삼 값을 낮추려 하자
그는 가지고 간 인삼을 불태우겠다고 위협하여 원가의 10배로 팔았다.
그는 이러한 무역활동으로 인삼 무역의 개척자로 평가받았다.






교육인적자원부 - 방정환


1899. 11. 9 서울~1931. 7. 23 서울.
아동문학가.

방정환 동상 /방정환 동상, 서울 광진구 ...
한국 아동문학 초창기에 활동한 작가이자 실천가이다.
호는 소파(小波), 필명은 잔물·금파리·북극성·몽중인
방경수(方慶洙)의 장남으로 태어나 1909년에 매동보통학교에 입학한 뒤 이듬해
미동보통학교로 전학, 1913년에 졸업했다. 이어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했으나 1914년 중퇴했다.
1917년 유광렬(柳光烈)·이중각(李重珏)·이복원(李馥遠) 등과 청년운동조직체인
'청년구락부'를 조직해 이듬해부터 기관지 〈신청년〉을 펴냈다.
1918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했으며, 〈청춘〉 9월호에 수필 〈관화 觀火〉를 발표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등사판 '독립선언문'을 인쇄해서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주일 간 구치소에 갇혀 있었다.
1920년 일본 도요대학[東洋大學] 철학과에 입학해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을 공부했다.
이때 〈개벽〉 도쿄[東京] 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그해 7월호에 시 〈갈마반도〉와 12월호에 소설 〈그날 밤〉을 발표했다.
1921년 5월 1일 김기전(金起田)·이정호(李定浩) 등과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해
"씩씩하고 참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늘 사랑하며 도와갑시다"라는 표어 아래
본격적인 소년운동을 전개했다.
1922년에는 천도교소년회 중심으로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선포하고,
개벽사에서 세계명작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펴냈다.
1923년 3월 20일 순수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했고,
그해 5월 1일 도쿄에서 손진태(孫晉泰)·윤극영(尹克榮)·진장섭(秦長燮)·고한승(高漢承) 등과
아동문화운동단체 '색동회'를 조직했다.
색동회는 발기회록에서 "동화 및 동요를 중심으로 하고
일반 아동문제까지 할 사"라고 밝히고 있듯이
이후 전국 각지에서 동화구연대회·아동예술강습회·아동예술전람회·소년문제강연회 등을 열어
소년운동단체의 통일을 꾀했고, 1925년에는 소년운동협의회 지도위원,
1927년에는 조선소년연합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1928년 조선소년연합회가 조선소년총동맹으로 개편되고
소년운동 노선이 변화하자 일선에서 물러나 〈어린이〉·〈학생〉 등의 편집에 힘썼다.





법무부 - 박문수

1691(숙종 17)~1756(영조 32).
조선후기의 문신.

박문수 생가 /박문수 생가, 충남 천안시 ...
소론계열의 인물이나 당색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할 것을 주장했으며, 군정과 세제의 개혁 논의에 참여했다. 부정한관리를 적발한 암행어사로 이름이 높다.
본관은 고령, 자는 성보(成甫), 호는 기은(耆隱).

할아버지는 세마(洗馬) 선(銑)이며, 아버지는 영은군(靈恩君) 향한(恒漢)이고,
어머니는 문경공(文敬公) 이세필(李世弼)의 딸이다.소론의 영수인 이광좌(李光佐)에게서 배웠다. 1723년(경종 3) 증광문과에 합격하여 예문관 검열로 벼슬길에 올랐다.
이듬해 설서·대교를 거쳐 병조정랑에 이르렀으나,
1724년(영조 즉위) 노론이 집권하면서 삭탈관직을 당했다.
1727년 영조가 당쟁을 조정하고자 소론을 등용한 정미환국 때 사서로 다시 기용되었고,
같은 해 9월 영남암행어사로 나갔다.
1728년 부교리를 겸하던 중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사로도순문사(四路都巡問使)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전공을 세워 경상도 관찰사에 뽑히고,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으로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다.
1730년대사간·도승지 등을 지내고, 이듬해 호남어사로 나가 굶주린 백성의 구제에 힘을 기울였다. 1732년 선혜청당상, 1733년 예조참판·대사헌을 지냈으며,
1734년 형조참판·호조참판에 오르고 진주부사(陳奏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37년에는 도승지·병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동지사(冬至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으나,
안동서원을 철폐시킨 일로 탄핵 받아 풍덕부사로 물러났다.
1739년 형조판서를 거쳐 함경도진휼사로
경상도의 곡식 1만 섬을 가지고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여 송덕비가 세워졌다.
1742년 병조판서, 1745년 어영대장,1748년 호조판서, 1750년 판의금부사,
1751년 예조판서 겸 세손사부(世孫師傅), 1752년 한성판윤 등을 두루 지냈다.
이해 내의원제조로 있을 때 왕세손의 죽음에 책임을 지고 제주도에 안치되었다가,
1753년 풀려나와 예조판서·우참찬에 올랐다.




문화관광부 - 황진이

여성가족부 - 신사임당

정보통신부 - 이천

해양수산부 - 장보고

국세청 - 봉이 김선달

식약청 - 대장금

농림부 - 정약용

건설 교통부 - 김정호

해양수산부 - 정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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