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에 대해 재미있는 사실 하나

한국전쟁때 북한을 지원했던 중국은 마오쩌뚱의 아들 마오안잉을 러시아 통역요원의 신분으로 전쟁에 참여시킵니다, 이 마오안잉은 마오쩌뚱의 장남으로 공산투쟁도중 국민당군에 잡혀 고문으로 죽은 첫번째 아내 양카이웨이 사이에서 나은 아들입니다, 그래서 마오쩌뚱은 이 마오안잉을 유달리 사랑했다고 하지요.

이런 아들을 28세의 신혼때 한국전쟁에 보냅니다 그리고 그 해 11월25일 미군의 네이팜 공격으로 벙커 안에서 불타 죽습니다, 사체가 하도 훼손되어 그를 찾을때 그의 손목에 찬 시계를 보고 알았다고 하는군요. 마오안잉의 사망 소식을 들은 마오쩌뚱은 절망하면서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조선에서 죽은 인민지원군 용사들이 한두명인가? 그들의 시신은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는데 내 아들의 유해만 돌아오게 할 수 없다, 그냥 조선에 묻어라"


그 후 전쟁이 끝나고 마오안잉의 유해는 중국으로 옮겨져 "중국의용군 혁명열사묘"에 이장되었습니다.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한국전쟁에서 남한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미8군 사령관 벤 플리트 (이사람은 독도는 일본땅으로 미의회에 보고를 올린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 보고서는 특급 기밀로 분류되 있었죠) 사령관에게는 외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름은 지미로 미군 폭격기 조종사였죠.

그는 한국에 오기전에 이미 그리스에 파견근무를 했기 때문에 굳이 한국에 올 필요가 없었습니다, 허나 그는 국가에 대한 마음과 자신의 폭격기 동료들 (그는 파견면제였지만 그의 동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동료애로 간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을 위해 한국전쟁에 자원해 파견되었습니다.


52년 3월 14일에 한국에 온 지미는 (그때 벤 플리트의 60세 생일이었습니다) 52년 4월 4일 새벽 1시5분에 출격하여 3시경 레이더에서 사라집니다. 곧 수색이 시작되었으나 벤 플리트 사령관은 "그정도면 충분하다, 더이상 수색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리고 이 후 한국전쟁에서 실종된 병사의 가족들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부치죠 "저는 모든 부모님들이 저와같은 심정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의 아들들은 나라에대한 봉사와 의무를 다 하고 있었습니다. 오래전에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바와 같이 벗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내어놓은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여기서 재목에서 말한 6.25에 대한 재미있는 사실이란? ->
한국전쟁은 우리 당사자의 일임에도 한국전쟁에서 참전해 죽은 지도층의 자식은 하나도 없다, 라는 사실.
profile